Category Archives: 재잘재잘

행복 – 책읽기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내 행복의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책을 읽을 때다. 재미있는 책, 흥미로운 책을 읽을 땐 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책 안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라인 안으로 흡수된다.

그 와중에 가장 행복할 땐 내가 그 스토리라인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 또는 비슷한 장소에 가본 적이 있을 때다. 그럴때면 정말 내가 책속 캐릭터가 된 것 같은, 또는 캐릭터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결국. 잠시나마 행복하게 현실도피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저자와 의사소통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좋게 생각하면 성숙하게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것 일수도 있고. 이렇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너만의 세상에 들어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해지기도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주석으론. 더 많은, 좋은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선 나도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해야 하고, 나 또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즉, 책의 내용을, 저자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런 일방적인 의사소통의 난 별로다.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책의 내용이, 저자의 생각이, 소설 조차도 더 풍부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비판적 생각도 즐거우니까.

여행가고 싶다. 기승전 — 여행.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하는 하다

나의 의견이 있고, 나의 생각이 있다. 나도 나만의 주장이 있고, 나만의 고집이 있다.

그렇기에 타인 또한 그만의 의견, 생각, 아집, 고집, 편견이 있을 것이란 것을 이해한다.

나와 완전 반대의 생각을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할 수 없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편협한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그만의 세계가 있음을 이해한다.

표현의 자유란 것은 결국. 타인을 해하지 않는 이상, 머릿속, 마음속, 가슴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언어, 행위, 글 그리고 그 모든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 표현이 나의 믿음과 정반대의 그 무엇일지라도.

타인을 해(害)하지 않는 이상. 이롭지 못하게 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이다.

버지니아에 모였던 자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비판할 수 없을 것 같다. 난 그 믿음에 굳게 반대하지만, 그들의 믿음을,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순 없다. 그것은 법리에도 어긋난다(살인, 폭력 등은 처벌 가능한, 입증 시 처벌해야 하는 행위이다 — 단, 단순히 그곳에 특정 사상을 갖고 참석한 자들까지 살인, 폭력 등의 행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론 처벌할 순 없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생각을 처벌하는 것이고, 생각을 처벌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매우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한 믿음과 생각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고 있고 이해한다.

그리울 것이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과거 야생의 숫사자처럼 백인, 특히 백인 남자들이 군림하던 그 시절이.

현실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이 그 세계가.

자신의 적디 적은 피부 멜라닌 함량과 Y 염색체만으로 존경받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 있다하던데, 이젠 아무도 자신을 존중은 커녕 하찮은 존재로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이 현실이 싫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비백인, 여자, 외국인, 무슬림들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면. 감히 그들의 알파인 힘많은 부자 백인남자들을 대상으로 삼을 순 없으니, 약해 보이는 희생양들을 대상에게 분노를 내뿜을 뿐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벌 받아야 하는 자들은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자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든다. 인간의 심리란 것이 그렇겠다 싶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 세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꽃향기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그리워하는 과거 숫사자들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숫사자들의 영역을 야금야금 빼앗아 먹은 것은 여자도, 외국인도, 특정 종교인들도 아닌, 야생동물들의 정치, 정책, 경제, 인간의 욕심, 욕망, 도덕성, 죄악, 윤리, 종교 등 수많은 이유들이었음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家 집 가
和 화할 화
萬 일 만
事 일 사
成 이룰 성

집안이 화목(和睦)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

집안이 화목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집안이 화목하지 아니하면, 집밖의 일이 잘될리가 없단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요즘. 우리집은 참 가고 싶은 곳이다. 완벽한 곳은 아니지만. 해가 질때가 되면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Play by the Rules

인간의 심성이 다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효율성을 찾는 것 같고, 그 효율성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때론 영어표현으로 cutting corners일 때가 있는 것 같다. 즉, 일반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정 또는 과정이 1-10이라면, 그 중 뛰어 넘어도 티가 나지 않는, 반대로 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그래서 하나 안하나 별로 차이가 없는 규정이나 과정은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는 행위를 하곤 한다. 나 또한 그러고자 하는 욕구가 매일 매일 몇번씩 있다. 이를 영어표현으론 cutting corners라고 한다. 또한. Not playing by the rules이기도 하다. Rule은 1-10을 차례대로, 또는 차례대로가 아니더라도 1-10을 모두 하는 것인데, 하나라도 뛰어 넘으면 룰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예전에 왕짱님이 종종 breaking the rule, not playing by the rule까진 아니어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bending the rule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 열정과 용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돌진해 나아가는 것은 매우 좋은 자세다. 그러나 언제나 기억해라.

Play by the rules. You always need to play by the rules.

한번 내가 룰을 어기면, 아무리 내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도 내가 룰을 어겼다는 것 때문에 의도 자체가 무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룰이 마음에 안들면, 룰 자체가 불공평하다면.

맞다. 그래서 정책/법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불공평한 룰이 있다면 룰을 어떻게 만들고 바꿀 수 있는지 배워서 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지, 룰을 건너 뛰거나 룰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

자본, 시간, 에너지와 같은 resource의 공통점은 그 양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떠한 개인이나 사회, 국가도 무제한적인 자본, 시간, 에너지 등의 resource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사회/국가보다) 많은 양의 resource를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유하고 있는 resource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예측성은 resource efficiency를 높여준다. 내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내 열정을 어떻게 쏟아부을 것인지를 결정할 때 나도 중요하지만 내 주변 환경이란 variable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 모두 정치적 카오스에 빠져있다. 예측성이 저하되면 도박성에 가까워지는데(50:50는 동전던지기와 마찬가지이고, 이는 도박에 가깝다) 그런 사회는 생산성과 안정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아까운 자본, 시간, 에너지를 비상식적인, 비헌법적인, 비민주적인 언행에 쏟아붓는 리더들 덕분에. 낭비와 혼란에 빠져있는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보리는 만 5세에 우리에게 왔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남편이 데려왔고 남편과 지난 5.5년 중 4년을 보내서 그런지 남편과 더 가까웠다. 난 원래 장난도 심해서, 아이 입장에선 가깝지도 않고 밥도 않주는 인간이(난 밥담당이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로 이사온 후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좀 많아졌고, 아픈 후론 내가 내 손으로 밥도 해먹이고, 아프면 옆에서 밤새 간호도 한다. 산책할 땐 난 그냥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 주의인데, 보리도 그걸 알아서인지, 그리고 아빠.엄마.자신은 한 “무리(pack)”라고 생각해선지, 요즘엔 산책 나갈 때 꼭 함께 가자는 나름의 표현을 한다. 

원래 시바견들은 독립성이 강해서 혼자있는 시간을 즐기고 스킨십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보리도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는건 좋아해도, 누가 옆에 딱 붙어 있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옆에 누우면 짜증내며 옆으로 도망가곤 한다. 

그러므로 최근 보리가 우리를 옆에 허락함과 동시에, 우리와 함께 있고 싶다는 표현을 하는건. 약해진거다. 

오늘 보리는 나와 만난 후 5.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내 다리에 머리를 얹고 잠 들었다. 수술한, 봉합이 열린 다리가 불편한지 계속 다리를 움직이다 이내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모든 생명체는 언젠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이치이다. 나는 이 이치를 거부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치료할 수 있는 것을 치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치료하되, 삶의 균형과 삶의 질을 놓쳐가며 생명연장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 것뿐이다. 

잘 산다는 것. 성공한다는 것. 행복하다는 것. 삶의 의미라는 것. 왜 사는지. 무엇을 향해 이리도 열심히 매일 같이 뛰는지. 

난 결국. 매일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라고 생각하게 됐다. 큰 행복일 필요도 없고 대박일 필요도 없다. 작은 행복들. 보리가 내 품에서 잠드는 경험을 통해 얻은 작은 행복이 오늘의 성공이다. 비록 이 아이의 아픔과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 슬픔일테지만,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순간엔 나에게 행복이다. 그래서 난 잘 살고 있고, 내 삶은 내 기준에 성공적이고, 난 행복하고, 내 삶은 의미있고, 난 내가 왜 사는지 알 것 같다. 

Poor Unfortunate Souls

이 사실을 언제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아주 오래, 어렸을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때론. 그 무엇을 얻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것은 내 영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내 영혼을 그 누군가에게 준다면. 내 영혼을 그 무엇인가에 바친다면. 그 댓가로 어쩌면 정말 엄청난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내 영혼이 흔들렸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영혼을 이미 팔아 넘긴 사람들은 나를 흔들었고, 영혼을 잃어버린 자들의 세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세상은 때론 화려했고 때론 지구 꼭대기 같았다. 그러나 그 대가는 항상 같았다. 내 영혼이었다. 물욕, 권력욕, 탐욕, 복종 등을 통한, 그를 통한 내 영혼의 굴욕과 몰살이었다. 내 영혼을 팔아 넘겨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나는 내가 곧은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난. 그냥 내 영혼을 사랑하고 내 영혼을 지키기로 한. 나를 지키기로 한. 나를 사랑한. 나로 남기로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조차 참 힘든 곳이었던 것이다.

Poor Unfortunate Souls.

souls